2013년말에 상해와 더불어 급성장하는 도시 심양에 다녀왔다. 당시는 국내 최대 지붕형 태양광 준공을 목전에 두고 반유반업 지인과 동행했다. 만주 봉천이라 불리는 심양은 상해, 북경, 천진 다음으로 중국의 4번째 도시이고, 10년전에는 도시 곳곳이 신축 공사로 인해 먼지가 뽀얄 정도로 급성장 하고 있었다.

요령성의 성도 심양은 11월이었는데 쌀쌀했다. 과거 고조선과 고구려 땅이었고, 발해의 땅이었다.

심양은 3.1운동 이후에 애국지사들의 독립운동 근거지로 활용되었으며, 1992년 한중수교 이후에는 중국진출의 교두보였다. 인천공항에서 한시간이면 갈 수 있어, 제주도 처럼 가까운 곳이다.

중국 최대의 코리아 타운 서탑가는 90년대 중반에는 허름한 중국 시골마을의 풍경이었으나 20여년의 세월동안 눈부시게 발달하였다.

반찬과 야채가 많아 중국 사람과 조선족들이 많이 온다. 중국 사람들이 김치를 잘 사먹는다. 한국의 재래시장과 흡사하기도 하다.






후금과 청나라 초기 수도였던 심양의 궁궐 선양고궁에 갔다.



누루하치의 후계자 홍타이지가 천하를 얻어 청태종이 되었다. 명나라를 정벌하기 전에 몽고와 조선을 복속시키려 하였으나 1626년 무방비 상태에서 정묘호란을 당한 후, 명과 후금 사이에서 실용적 중립외교를 취하던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반정을 통해 서인세력이 집권해서 고구려의 백성이었고, 피가 섞인 여잔족을 오랑캐라 생각하고, 명나라를 섬기자던 배금척화 주장이 힘을 얻어 대립하다가 홍타이지가 침략하자 불이나케 남한산성으로 파천하였다.
주전과 주화론이 팽팽했으나 2차 파천지로 고려되던 강화도 가는 길이 차단되고 성곽을 에워싸자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던 인조는 삼전도(현재의 서울특별시 송파구 삼전동 및 석촌동 부근에 있던 하중도의 나루터였다)로 내려와(인조실록에 정축하성) 굴욕적 삼궤구고두례를 취해야 했으니 1636년 병자호란이었다.
그래도, 홍타이지는 형제국가라고 대우해서 백성이 많은 도성안을 벗어난 한적한 곳을 택해 주었다.
임진왜란은 7년전쟁이었지만, 인구 153만명의 여진족에게 53일만에 힘한번 못쓰고 굴복한 치욕적인 사건이었다. 대세 판단을 못하고, 명분을 중시하던 무능한 왕과 신하들의 오판 결과였고, 소현세자가 인질로 끌려갔다. 후에 소현세자가 청나라의 문물을 잘 보고 배워 귀국후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려 했으나, 인조의 배척으로 조선이 망국으로 가는 내리막길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때의 홍타이지 청태종이 있던 수도가 심양이었다.

일행들과 찾은 식당은 그야말로 산해진미가 가득하였다.




요즘 전문직, 부자들이 중국을 탈출하고 있다. 중국의 3기 지도부 격인 상무위원 7명이 시진핑 충성파로 구성되었다. 중국은 부패 엘리트 카르텔이 아닌 정치 엘리트가 지배한다.
중국의 내부 상황을 보고 잘 대응해야 한다. 외교는 가장 값싸게 평화를 얻는 방법이다. 요즘 외교가 엉망인데, 전쟁의 책임은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잘못이지만, 피해자가 초래하는 경우도 많다.
최근 중국과의 잘못되는 외교관계로 경제침략이 우려되는 상황이며, 그 결과는 엄청난 대중국 무역적자로 다가올 것이다.
외교는 균형이 중요하다. 대세를 잘못읽어 외침을 초래했던 과오를 반복하고 있는데, 미국과 일본의 해양세력과 북, 중,러와의 힘에 균형을 잘 판단하고, 한쪽에 경도되지 않도록 해야 큰 화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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