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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즈로 보는 세상

서초 효령로 청권사 이야기

by 바이칼호1 2023. 7. 7.

방배역에서 서초역 방향으로 오다보면 청권사(서초구 효령로 135)라는 사당이 있는데, 이곳은 태종 이방원의 둘째 효령대군 릉이다.


부자간에도 나누기 어렵다는 권력을, 보다 통치를 잘 할 것 같은 셋째 충령(세종대왕)을 위해서 던지고 효령은 야인으로 생활하였다. 
‘청권(淸權)’의 뜻은, 옛날 중국 주(周)나라의 우중(虞仲)왕자가 아버지 태왕(太王)의 뜻을 헤아려 아우에게 왕위를 양보한 미덕을 칭찬하면서 공자(孔子)가 청권이라고 하였는데, 효령대군이 아버지 태종(太宗)대왕의 의중을 헤아려 아우인 충녕대군(세종대왕)에게 왕위를 양보한 미덕을 세종대왕이 나의 형이 곧 청권(권력을 청산)이라고 칭송하였고, 정조(正祖)대왕이 효령대군의 사당을 청권사로 사액(賜額)한데서 연유한다.

 
현재 사당역으로 알려진 사당동의 사당은  곧 현 청권사(淸權祠)를 일컫는다. 조선시대에 경기도 과천군 상북면 사당리였으며, 1914년 3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와 동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한 경기도 구역획정 때 이 일대 능마을 · 동산마을 · 양짓말 등을 병합하여 시흥군 신동면 사당리라 하였다. 광복 후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2호에 의한 서울시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서울시에 편입되어 영등포구 사당동이 되었다.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6548호로 영등포구에서 관악구를 분리 신설할 때 관악구에 이속되었고, 1980년 4월 1일 대통령령 제9630호로 관악구에서 동작구를 분구하면서 사당동은 동작구에 속하여 오늘에 이른다. 그런데, 청권사는 사당동에 인접한 서초구 방배동 효령로에 있다. 

청권사 내 효령대군 묘소

왕정시대에 왕의 능력과 신하와의 관계에 따라 국가는 흥망성쇠하였다. 고구려는 초강대국 수·당의 침공을 막아냈지만,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방어전에 성공했을 뿐, 나라는 만신창이가 되었고 백성의 살림은 거덜 났다. 연개소문이 죽자 억눌려왔던 모순이 폭발했다. 결국 아들들끼리 권력 다툼을 벌이자 고구려는 안에서부터 무너졌다.

 

고구려의 후계를 자처했던 고려는 귀족 기득권들의 발호를 억제하지 못해 무너졌고,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왕자들의 난과 싸움을 피해 함흥으로 가서 나오지 않았다.

 

권력을 잡으려 다투지 않은 양령과 효령 두 형이 있었기에 훌륭한 성군이 나왔고, 성군의 애민 정신으로 기득권의 반대를 제압하고 한글을 창제 하였으며,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글이라고 많은 언어학자들의 평가를 받으며, 한류의 초석이 되었다. 또한, 북벌(4군6진 설치로 압록강과 두만강을 국경선으로 결정)과 남벌(이종무의 대마도 정벌) 등 영토도 넓히며, 조선역사상 가장 찬란한 시대를 열었다.

 

권력은 사적 욕망이 아닌, 전체를 위해 공정히 행사되어야 하며, 스스로를 돌아보아 주변에 더 훌륭한 사람이 보이면 양보하고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 권한이 있을 때 기득권의 발호를 보면서도 개혁하지 못한 위인이 다시 나서며 불란을 일으키고, 권력을 강화하여 사익만을 챙기고자 한다면, 나라는 쉽게 위태로와 질 것이고, 그 권력의 끝은 늘 그러했듯이 다시 비극으로 끝날 것이다. 

 

강남 선정릉 처럼 번화해진 서초 한복판에 위치한 청권사는 개발 제한되어 역사적 사료의 가치 뿐만 아니라 도심의 허파 노릇을 하기에 충분하다고 본다. 뿐만 아니라 화무십일홍 권불십년(花無十日紅權不十年)을 생각하며, 권력에 초연함을 깨닫게 하는 명소로 더 가치가 있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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