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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앙뜨와네트와 드골

by 바이칼호1 2022. 12. 27.

18세기 말 19세기 초 유럽에서는 자유주의 사상이 퍼지면서 사회 전반에 걸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이러한 현상들은 정치뿐만 아니라 문화예술 분야에서도 나타났다. 바로 신고전주의다. 신고전주의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전통문화 부활을 통해 과거 영광 재현을 추구했던 사조였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그저 옛것만을 고집할 뿐 새로운 시도나 도전정신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던 중 1789년 7월 14일 파리 시민들은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을 시작으로 봉건제도 폐지와 인권선언 발표라는 역사상 유례없는 대사건을 일으켰다. 이를 가리켜 프랑스 혁명 또는 대혁명이라고 부른다.

 

혁명의 트리거는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다. 그녀는 루이 16세의 아내로서 사치스럽고 방탕한 생활로 인해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이로 인해 오스트리아 출신이었던 그녀는 프랑스로 망명하였고 그곳에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지금으로부터 약 200여 년 전쯤 일어난 프랑스 혁명은 세계사에 길이 남을 만한 일대 사건이었다.

 

그것은 기존 체제로부터의 완전한 단절이자 혁신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일에는 명암이 존재하듯 긍정적인 면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분명 존재한다. 우선 신분제 철폐 및 평등사회 실현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민주주의 발달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 절대왕정 타파와 입헌군주제 수립 그리고 자본주의 경제체제 확립 등 다양한 성과를 이뤄냈다. 나아가 예술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전까지만 해도 귀족 중심의 화려하고 웅장한 작품들이 주를 이뤘다면 이제는 서민층으로까지 범위가 확대되었다. 따라서 보다 현실적이고 사실적인 묘사가 가능해졌다. 더불어 자연스럽게 인간 내면의 감정 표출에까지 이르게 되면서 낭만주의 탄생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이후 프랑스는 다시 2차대전중 독일의 침략과 지배를 받게 된다.

 

프랑스 역사상 최고의 지도자로 평가받는 샤를 드골 (Charles de Gaulle) 은 나치 점령 하에서의 레지스탕스 활동 및 해방 이후 자유프랑스 정부 수립 그리고 2차 대전 종전 후 초대 총리 역임 등 20세기 현대사 속 굵직굵직한 사건들마다 항상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다. 하지만 정치 경력 내내 좌·우파 양쪽으로부터 끊임없이 비판을 받아왔고 또한 말년에는 측근이었던 미테랑과의 갈등으로 인해 정계 은퇴 선언을 하는 등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도 국민들로부터 여전히 존경받고 사랑받는 진정한 위인임에는 틀림없다. 1944년 6월 18일 파리 근교 생드니(Saint-Denis) 에서 태어난 샤를 드골은 어린 시절부터 군인 집안에서 자라며 자연스럽게 군인의 길을 걷게 된다. 사관학교 졸업 후 소위로 임관하여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대위로 전역하였다.

 

이후 잠시 변호사 생활을 하다가 1940년 독일군 포로가 되었는데 이때 영국 정보국 MI6 요원이자 훗날 대통령이 되는 조르주 비도크(Georges Bidault) 를 만나 친분을 쌓게 된다. 이듬해 프랑스로 돌아온 뒤 본격적으로 정치계에 입문했고 1945년 4월 25일 임시정부 수반으로서 공식 취임하였으며 그해 8월 15일 마침내 조국 땅을 밟는다. 이어 9월 3일 정식으로 국가 원수 자리에 올라 12월 13일 헌법을 제정 공포했으며 1946년 1월 21일 의회 선거를 실시하였는데 예상외로 좌파 연합이 승리하자 우파 정당들은 총선 보이콧을 선언하기도 하였다.

 

 

프랑스 국민들은 2차 대전 당시 레지스탕스 운동을 통해 자유프랑스군을 결성하여 연합국 측에 가담하였다. 연합군측에서는 승리 후 승전국으로서 프랑스 정부수립 과정에서의 참여권을 보장하였고 실제로 국제연합 상임이사국 지위도 부여되었다. 그러나 전쟁중이었던 1944년 7월 16일 파리 근교 베르사유궁에서 열린 회의에서 미국 영국 소련 중국등 4개국 정상만 참석했고 정작 프랑스 임시정부 수반이던 샤를 드골 장군은 초대받지 못했다. 그러자 분노한 드골장군은 "자유프랑스 만세"라고 외치며 회의장을 떠났다.

 

이후 8월 20일 유엔총회 연설에서도 자신에게는 발언권조차 주지 않은 채 강대국들끼리 협의해서 만든 평화안에 서명할수 없다며 거부의사를 밝혔다. 1945년 5월 28일 미군정 장관 하지 중장과의 면담자리에서도 자기 의견대로 할테니 간섭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1946년 11월 21일 실시된 총선에서 극우정당인 민족전선이 총 의석 400석 가운데 293석을 차지하며 대승을 거두었다. 또한 1948년 12월 15일 치러진 대선 결선투표에서 드골후보는 95%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하면서 사실상 정계복귀 선언을 하였다. 하지만 1949년 3월 31일 개최된 의회연설에서 과거 히틀러 치하에서 유대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이라며 나치의 협력자였던 기욤 지로의 사면을 요청했다가 여론의 역풍을 맞고 사임해야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독일 점령하의 프랑스 비시 정권(Vichy Regime) 하에서 나치 부역자 처벌문제를 놓고 벌어진 좌우파 간의 갈등 및 충돌을 말한다.

 

1940년 6월 22일 체결된 ‘비시협정’에 의해 성립된 비시정권은 친독·반유대 정책을 추진하였으며, 반공주의자인 드골 대통령이 이끄는 우파 세력과는 적대관계에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좌파세력은 “나치협력자 숙청”을 요구하였으나, 우익세력은 “숙청보다는 화해”를 주장하였다. 따라서 전후처리과정에서 좌파는 공산주의자와 함께 탄압대상이 되었고, 우파는 공산당원 이외의 모든 정치범 석방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서로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1947년 1월 13일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을 계기로 양측간의 충돌이 격화되어 내전 직전까지 갔으나, 그해 9월 미·영·프·소 4개국 외상회의 결정에 따라 일단 진정되었다. 이어 1951년 알제리 독립전쟁 발발이후 대규모 난민사태 발생하자, 1952년 초 재결집한 좌익계 급진단체 인민공화연맹(RPF) 주도하에 대대적인 반대시위가 벌어졌다. 이때 RPF 지도부는 국가비상사태 선포계획을 수립하기도 하였으나, 1953년 휴전협정 조인직후 사태가 진정됨으로써 유혈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프랑스에선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나치 부역자 청산 작업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독일 점령지 내 비시정권 인사 1만여 명을 체포했으며 친독협력단체 및 언론사 간부 800여 명을 재판에 회부했다. 뿐만 아니라 6천여 명의 공무원에게도 공직추방령을 내렸다. 심지어 사형선고를 받은 자만도 무려 9천 명이 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40년 대 후반 알제리 독립전쟁(1954~1962)이 발발하자 반유대주의 정서가 확산되었고 이때 등장한 정치세력이 바로 민족전선이다. 

 

본래 우익 성향이었지만 전후 상황 변화에 따라 좌파 진영과도 연대했는데 이로 인해 좌우 이념 갈등이 더욱 심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8년 선거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집권당이 되었고 1969년 사회당 정권이 들어선 뒤에도 계속 여당 자리를 유지했다. 물론 중간중간 위기도 있었다. 1968년 학생운동 탄압과정에서 발생한 이른바 '68혁명' 여파로 1972년 대통령선거에서 패배하기도 했고 1981년 프랑수아 미테랑 후보에게 패했을 땐 당명을 공화당으로 바꾸기도 했다. 그러다가 1995년 시라크 대통령 당선 이후 우파 정당 최초로 단독 과반의석을 확보하며 재집권에 성공했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민족전선은 2002년 대선에서 또다시 참패하는데 이것이 결정타가 되어 2003년 해산되고 말았다.

 

1988년 엄혹한 군사정권 중에 난 공기업 취업과 언론사 취업을 두고 많이 망설였었다. 당시 복간되던 경제지에 입사 신청을 하고, 먼저 기자생활 하던 고교 친구를 만나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 결론은 기자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없고,  말년은 비참할 수 있으니, 잘 선택하라고 해서, 소심했던 나는 뜻을 굽히고 말았다. 

 

현재 우리나라의 보수 언론 뿐만 아니라 대다수 방송사들을 보면, 보도해야 할 일들은 덮고, 반대진영의 사사로운 일들은 침소봉대하거나 왜곡해서 대대적인 방송 및 보도로 국민을 세뇌시키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프랑스 드골은 언론인을 포함한 친 나치 지식인들은 더욱 엄격히 처벌하었다.

 

우리나라 주류 언론은 친일의 뿌리이자 줄기였다.  2020년 8월 15일 광복절 75주년을 맞이하여 국내 주요 일간지에서는 일제강점기 시대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조선 침략 만행을 고발하는 기사나 사설 및 칼럼 들이 실렸다. 하지만 이러한 논조와는 다르게 몇몇 신문사들은 과거 식민 지배 당시 친일반민족행위를 한 자들의 후손이거나 현재도 경영진 혹은 주주로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 실제로 동아일보 창업주인 인촌 김성수 집안은 1941년 태평양전쟁 지원단체인 흥아보국단 준비위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또한 독립운동가였던 장준하 선생 암살 사건과도 관련되어 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중앙일보 설립자인 홍진기는 3·1 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명이었던 의암 손병희 선생 사위였지만 이후 변절하여 적극적으로 친일 행위를 하였다. 그리고 방응모 사장은 1940년 매일신보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서 학도병 권유 글을 기고하였다. 한국경제신문 창간자인 장기영은 만주국 명예총영사였으며 1950년 5월 28일 국방부 정훈국장 자격으로 국회 프락치 사건 공판에 출석하여 공산당원 색출 방법을 제시하기도 했다. 문화일보 발행인 홍석현은 신직수 법무부 장관 아들이며 1994년 문민정부 출범 직후 안기부 기조실장 자리에 올랐다.

 

상업화된 언론이 공정하기를 바라는 것은 바보짓이라지만 언론 지형을 바꾸지 않으면 다수 국민들은 바로 이웃과 형제를 향한 돌격대가 되거나, 눈뜬 봉사로 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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